Home » 한국교회사 » [한국교회사] 초기 개신교 선교활동-1880년대 이해해야

이수정이 들어 오기전 시대적인 배경의 이해가 필요하다. 당시 세계는 근대화(Modernization)의 흐름 가운데 있었다.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200년이 지난 1989년 독일의 베를린 장벽 붕괴까지를 근대화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근대화란 그 이전 중세시대의 봉건제도 붕괴를 의미한다.

1861~1865년동안 발생한 미국의 남북전쟁은 한국선교와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 한국에 장로교가 들어올 때 남장로교와 북장로교가 나뉘어서 들어오는 것도 남북전쟁과 연관이 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받아들였다. 당시 조선은 청, 러, 일, 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조선은 고종이 대원군에 의해 수렴청정을 하는 상황이었으며 또 다른 권력으로 명성왕후를 중심한 민씨 세도가가 있었다.

당시 외래문물에 대한 입장으로 개방을 반대하는 위정척사파와 개화파가 있었다. 위정척사파는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맞아 떨어졌다. 개혁을 원하는 세력은 점진적인 개혁을 원하는 수구파로서 민씨의 인척인 민영익과 김윤식, 김홍집 등이 있었다. 하지만 급진 개화파는 서양사상까지도 적극적으로 수용하자는 입장이었다. 대표적인 급진개화파로는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이있었다. 개화파는 기독교에 대해 가장 적극적인 입장이었다. 김옥균에 의해 조선에 선교사들이 들어오는 계기가 마련되기도 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있었다. 이는 구식군대와 신식군대인 별기군의 갈등이었다. 임오군란으로 별기군을 만들었던 일본공사관이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인해 1882년 제물포조약을 통해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는 계기가 마련된다. 이 틈을 타서 1882년 미국은 조선과 ‘조미수호조약’을 체결한다. 1883년 민영익, 유길준 등이 ‘견미단’이란 이름으로 미국사절단으로 파견된다.

1884년, 개화파를 중심으로 갑신정변이 일어난다. 우정국 낙성식 때 수구파를 초청하고 민영익이 칼에 맞는 사건이 발생하지만 3일천하로 끝난다. 김옥균과 박영효는 일본으로 망명한다.

위에 열거한 사건들은 1885년 조선반도에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들어오기 블과 1년 전에 발생한 엄청난 사건들이었다.

이수정은 수구파였다. 일본에서 농업의 근대화를 보고 관심을 가졌다. 쓰다 센이 준 성경을 읽다가 특히 팔복을 읽다가 은혜를 받고 성경을 번역하는 일을 하게된다. 처음에는 한문과 한글이 혼용된 성경을 번역하다 나중에는 한글만으로 기록된 ‘마가복음’을 번역한다. 이수정은 조선에 선교사를 요청하는 편지를 쓰기도 하지만 조선에 들어와서는 처형당한다.

조선은 선교사보다 성경이 먼저 들어온다.

미국사절단인 견미단이 열차에서 선교사를 만나 당시 2천달러의 거금을 지원받는 일이 있었다.
맥클레이는 직접선교하지 않았지만 선교 다리 역할을 한다. 1884년 6월에 맥클레이는 고종으로부터 선교에 대한 윤허를 받고 3개월 후인 1884년 9월에 알렌 선교사는 고종의 윤허를 받고 중국에서 조선으로 들어오게 된다. 류대영 교수는 알렌을 조선 최초 상주 선교사로 언급한다.

갑신정변 때 민영익을 서양 수술로 치료한 알렌이 고종의 허락으로 주치의가 되면서 광혜원을 설립한다. 또 알렌은 조선주재 총영사로 활동한다. 알렌 선교사에 대한 다른 시각으로 미국의 국익을 위해 일하고 조선의 많은 광산채굴권을 미국에 넘겨주는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있다.

애비슨 선교사는 고종의 질병을 치료하고 신임 주치의가 된다. 알렌이 귀족과 왕족을 위주로 치료한데 반해 애비슨 선교사는 평민과 백정을 치료하는 당시로는 신분을 초월한 파격적인 의료행위를 한다. 치료받은 백정의 아들이 교육을 받고 후에 의사가 되기도 한다.

애비슨의 역할중에 주목할 만한 것은 20대 이승만에게 영어성경을 넣어 주었는데 이승만이 감옥에서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성경을 읽고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난다. 애비슨은 당시 세브란스병원 설립을 위해 당시 1만달러의 엄청난 돈을 끌어들이게 되는데 이는 석유로 돈을 번 세브란스라는 사람이 병원설립을 위해 기부한 것이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아펜젤러 선교사가 들어온다. 최초의 교육선교사로 기록된다. 언더우드는 26세, 아펜젤러는 25세에 조선반도에 들어왔다. 이들은 영어를 가르치는 교육선교를 실시한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설립하고 언더우드는 경신학교를 설립하는데 나중에 연희전문학교가 된다. 스크랜튼 부인에 의해 이화학당이 설립된다. 당시 이화학당의 입학자는 1명이었고 졸업생이없을 정도로 열악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졸업하기 전에 결혼을 하기 때문이었다.

초기 한국교회의 성장배경에는 이미 말씀이 들어왔다는 점, 처음 교파간 갈등이 없었다는 점, 선교분할정책에 의해 자신의 구역에서만 선교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선교방법에 대한 갈등문제가 있었는데 알렌의 간접선교 방법과 언더우드의 직접선교 방법이 갈등했다. 이는 알렌과 언더우드가 아직 젊어 경험이 부족한 이유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당시 중국에서 오랜 경험을 한 네비우스를 조선에 파송하는 일이 있었다. 네비우스는 조선에 2주간 머물면서 언더우드, 마포삼열 선교사 등에 큰 영향을 끼친다. 그것이 바로 자립, 자전, 자급을 강조한 토착선교의 실천이었다. 네비우스의 영향으로 성경공부반이 생겨 나중에 사경회를 촉발하는 계기가 된다. 당시 조선 교회의 80퍼센트 정도가 자립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정리: Stone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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