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바울신학원 » ‘한국교회의 성장과 쇠퇴’-바울신학원 한국교회사

[바울신학원 한국교회사 ‘한국교회의 성장과 쇠퇴’에 대한 강의가 5월 27일 뉴저지 포트리에 있는 바울신학원(원장 김동수 목사)에서 진행됐다. 석태준 목사(롱아일랜드 나눔의교회)는 한국교회가 회복되기위해  처음사랑을 회복해야 할 것임을 강조했다.]  

한국교회는 어떻게 성장해 왔고 그 성장의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한국교회는 처음 시작할 당시 얼마되지 않은 신도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만 해도 전국민의 2%가 안되는 숫자였다. 

1940년대 37만, 
50년대 60만,
60년대 120만,
70년대 200만이었던 것이
90년대에 860만으로 성장했다. 
2017년 정부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크리스천이 960만명이 넘는 것으로 나왔다. 

하지만 이 정부통계에 대해서는 정확성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있다. 왜냐하면 교회를 옮겨다니는 사람들이 있어 중복통계에 잡힐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반론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성장은 아시아 지역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초기 한국교회의 성장원인은 무엇이었을까?

1. 선교사의 우수성을 꼽을 수 있다. 
교육적으로도 탁월했으며 무디의 부흥운동 등을 경험했던 선교사들이었다. 

2. 선교정책의 탁월함을 들 수 있다. 
-직접선교와 간접선교의 적절한 균형을 유지한 점이다. 직접선교란 직접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간접선교란 의료, 교육, 구제선교를 말한다. 특별히 의료선교를 통해 궁중이나 일반 백성의 마음을 신속히 붙잡을 수 있었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자립, 자력, 자치)의 영향때문이었다. 네비우스의 핵심은 성경공부였다. 여기에서 사경회를 열었고 그곳에서 부흥이 일어나게 됐다.
-교파를 초월한 선교와 선교지를 분할했던 것이 주효했다. 

3. 유교, 불교, 무속종교들이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때 답을 주지못했는데 그 영적인 공백을 메워주는 역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4. 성경번역의 영향을 들 수 있다. 한국은 사람보다 말씀이 먼저 들어왔다. 
성경번역은 두곳에서 진행됐다. 서북지역에서는 존 로스목사님, 서상륜, 백홍준 등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이수정이 마가복음 번역이 있었다. 

한국교회 성장이 주춤했던 시기가 있었는데 1930년대 신사참배 문제때문이었다. 

1. 감리교는 당시 대체로 쇠퇴했다. 그것은 사회적 책임을 강조함으로 복음의 선명성이 흐려진 이유가 있기도 하다.  

2. 감리교의 쇠퇴기간동안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성결교단이었다. 1907년 동양선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돼 1920년에 2천명 정도였던 성도가 5년이 지나면서 2만여명으로 성도가 증가한다. 그것은 복음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중생-신유-재림-성결 등 4중복음을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이성봉 목사 등 부흥사의 영향도 있었다. 

3. 장로교는 신사참배 문제 이전까지는 성장했다. 평양대부흥을 경험했던 마포삼열 선교사 등이 복음적인 신학을 견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38년 신사참배를 가결하는 사건이 발생해 유대영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35만 이상의 장로교 성도가 이후 20만으로 줄어들었다는 통계가 있다.  

그렇다면 해방 이후 한국교회의 성장은 어떤 과정을 거쳤는가?

1. 대립과 분열의 시대
이 시기에 한국전쟁이 있었다. 하지만 위기는 복음의 기회로 작용한다. 북한교계 지도자의 남하로 남한교계의 성장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영과 육을 잘 돌보는 사역을 실시했다. 한경직 목사가 주장한 ‘복음과 빵’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일본은 왜 국가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까?
전쟁 이후 복음을 받아들일 기회가 있었으나 6.25로 인해 일본의 경제가 부흥되면서 그 기회를 놓쳐 버리게 된 것으로 분석된다. 당시 맥아더는 미국교회에 성경 1천만권과 선교사 5천명을 일본에 보내달라고 미국 기독교에 요청한다. 하지만 미국교계는 일본과 분담해서 400만권의 성경을 보낸다. 선교사의 경우 5~10년간 파송한 선교사가 100명이 안되었다. 일본의 어느 교수는 그 당시가 일본이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가장 좋은 시기였으나 그 때를 놓쳐 버렸다는 것이다.  

이 시대에 한국 기독교는 3회의 분열과정을 겪는다. 그 원인은 
1. 신사참배로 인해 고신의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한 분열.
2. 보수의 박형룡과 진보의 김재준을 중심으로 한 분열. 
3. WCC의 에큐메니컬 가입문제로 인한 분열 등이었다. 

또 정교일치로 인한 교회의 세속화도 분열에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에 나온 대표적인 이단으로 나운몽의 용문산, 박태선 전도관, 문선명 통일교 등을 들 수 있다.

나운몽의 사상은 성경과 동양철학을 합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기독교는 유교, 불교와 통한다. 공자와 석가도 예수처럼 하나님이 보낸 계시자이다 등을 주장한다.  

박태선은 구약은 할례, 신약은 세례인데 은혜시대는 ‘체례’라 주장한다. 이 체례는 문선명의 ‘피가름’과 유사한 주장을 하고 있다. 원리강론에 복귀과정이 있는데 그것은 재림주와의 접붙임 즉 성관계를 통해 회복된다고 주장한다. 

한국교회의 최대 성장기는 1960-1988 이었다. 당시 큰 역할을 한 분이 빌리그래함 목사였다. 빌리그램함 목사는 1952년 한국전쟁 중에 한국에 왔으며 1958년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한국에서 집회를 가졌다. 이때 한경직 목사가 통역했다. 

20세기를 대표했던 빌리그래함 목사가 왜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았을까? 드것은 빌리그래함 부인 루스 그래함이 평양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한국에 대한 깊은 인상을 갖게 된 것이 남편인 빌리그래함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한국교회는 대립과 분열의 시기를 지나면서 초교파 선교가 많아진다. 그리고 해외선교사를 이때부터 많이 파송하게 된다. 당시 한국사회는 급변하는 불안한 시대였다. 4.19 / 5.16 / 3선개헌 / 5.18 등의 사건이 있었으며 또 산업화로 인해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이 극도의 불안속에서 복음을 듣게 된다. 

도시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교회가 대형화되고 성장의 모델이 되는 교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성령운동과 구역예배의 조직화로 성공을 거두게 되고 소망교회는 말씀으로 부흥하게 된다. 그리고 사랑의교회는 제자훈련으로 성장하게 된다. 명성교회는 새벽기도로 대표된다. 성장기의 모델교회라 할 수  있다. 

한국교회가 성장을 멈추는 정체기가 왔는데 1988년-1992년 까지이다. 당시 계시록에 나오는 숫자인 14만 4천명이 감소했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 당시 불교와 천주교는 성장을 한다.    

한국교회의 침체기 특징은 외부적으로 신학교를 지원하는 학생이 감소되고 평소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가 감소세를 나타냈다. 1992년 10월 28일 다미선교회의 시한부종말론을 통해 휴거를 주장하는 일부 신도들이 전세계의 매스컴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로인해 기독교는 일반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기도 했다.  

감사한 것은 그 기간에도 선교사의 숫자는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한국교회를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이제 한국교회를 향한 제안을 생각해 볼 시간이다. 그것은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된다’는 것이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신앙에서 개인과 민족을 분리한 적이 없다. 말과 행동이 일치된 삶을 살았다. 모든 고난의 역사 가운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에게 있어 삶의 변화는 성령의 역사로 인한 것이었다. 

-정리: Stone Choi.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
*

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