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한국교회사 » [한국교회사] ‘평양대부흥은 세계적인 부흥의 흐름속에서 발생했다’

바울신학원 한국교회사 ‘부흥운동’에 대한 강의가 4월 8일 뉴저지 포트리에 있는 바울신학원(원장 김동수 목사)에서 진행됐다. 강사인 석태준 목사(롱아일랜드 나눔의교회)는 평양대부흥운동이 웨일즈의 부흥운동과 더나아가면 미국의 대각성운동 선상에서 진행된 것임을 강조했다. 다음은 강의를 요약한 내용이다.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은 세계적인 흐름속에서 발생했다. 부흥운동이란 믿지 않는 사람이 중심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다시 깨운다는 의미다.

영적대각성의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의 영적대각성이다. 미국의 영적대각성운동은 1720년부터 시작됐다. 이때는 청교도가 미국에 발을 딛기 시작한 지 100여년이 지난 시점이다. 미국의 신앙이 3세대로 넘어가면서 침체기로 접어드는 시기였다. 그때 조나단 에드워드라는 사람이 나타나 미국의 영적 대각성을 이끌게 된다. 그는 예일칼리지에 다니던 중 병에 걸리는데 이를 계기로 에드워드는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된다.

당시 미동부 지역에 지진이 있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이 지진을 먼저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그에 더해 영적인 의미를 설명했다. 그는 메사추세츠 지역을 중심으로 부흥운동을 펼친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이 직면했던 문제를 상기시키며 미국이 제사장나라가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미국은 이때부터 제사장나라로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했다. 미국상황에 맞는 기독교를 찾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조지 휫필드는 대각성운동에 기름을 붙는 역할을 했다. 당시 영국에서는 복음주의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존 웨슬리 주도로 복음주의 운동이일어났다. 웨슬리는 독일 경건주의 모라비안의 영향을 받았다. 웨슬레가 모라비안을 찾아가 ‘자신은 믿음이 없는데 설교를 계속해야 되느냐?’고 질문을 던졌을 때 모라비안은 웨슬레에게 ‘믿음이 있을 때까지 설교하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웨슬레는 이후 모라비안 집회에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된다.

존 웨슬리는 탄광갱도에 들어가는 이들을 위해 새벽에 방문예배를 드렸다. 이방문예배가 새벽기도를 최초로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웨일즈는 이반 로버츠(Evan Roberts)가 케직(Keswick)사경회를 통해 부흥운동을 일으킨다. 그것은 청년기도운동이었다. 200만명이 예수를 영접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인도 아삼에는 웨일즈 장로교 선교사가 오랜동안 선교했으나 열매가 없었으나 케직사경회의 영향으로 큰 부흥이 일어난다. 세이모어는 미국의 오순절 운동에 영향을 준다. 이 시대 부흥운동의 공통점은 어려운 시대에 부흥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이런 흐름속에서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웨일즈의 영향을 받고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원산에서–>평양으로 –>백만인 구령운동 순으로 흥운동이 한반도에서 발생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다. 한국내 위정척사파는 청나라를 모형으로, 급진개혁파는 일본을 모델로 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다. 1905년 을사조약을 통해 일본은 조선통감부를 설치한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하에서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났다. 평양대부흥운동의 영향으로 척불숭유, 샤머니즘 등의 전통종교가 퇴조한다. 또 서구문물을 갈망하는 현상이 나탔다. 평양은 근세상에 가장 큰 고통을 겪었던 장소였다.

부흥운동은 원산에서 먼저 일어난다. 원산은 캐나다 선교지였다. 두 여선교사인 화이트와 매클리라는 선교사가 하디 선교사를 초청한다. 하디는 캐나다 의료선교사로 영국시민권을 가진 선교사였다. 하디는 기도중에 한국사람을 아래로 보았던 자신의 자만심을 깨닫고 원산에서 두 여선교사들에게 이것을 고백하고 또 조선사람들에게도 이를 고백하면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
강원도를 시작으로 개성 서울 등을 다니며 집회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

1906년 8월 평양에서 사경회가 열렸다. 웨일즈 부흥소식을 웨일즈로부터 온 선교사가 전해준다.
길선주 장로가 회개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로인해 이전에는 죄로 여기지 못했던 개인적, 도덕적인 것까지도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난다.

이런 회개운동이 부흥으로, 전도운동으로 이어졌다. 기억해야 할 것은 평양대부흥이 일어나기 이전에 4년간의 기도운동이 있었다는 점이다. 사경회는 평양장대현교회에서 1907년 1월 2일~15일까지 간 열렸다. 낮 사경회, 밤 부흥회로 열렸다. 강사는 길선주 목사였다. 길 목사는 회심 이전에 도교를 믿었고 마오이즘을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마포삼열 선교사의 영향을 받았으며 1906년부터 길선주는 다른 사람들을 모아 새벽기도를 했다.

길선주 목사는 주로 밤부흥회를 인도했다. 내용은 주로 성령에 대한 내용이었다. 평양대부흥의 가장 큰 역사는 마지막 이틀 중에 발생했다. 길선주 목사는 설교를 극화해서 전달하기도 했다.
모든 부흥운동에는 회개 이후에 따라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평양대부흥은 한국교회의 신학방향성을 결정했다. 경건주의와 보수주의, 근본주의, 개인중의, 내세지향적인 신앙특징을 갖는다. 평양대부흥은 복음의 토착화로 연결되었다(Glocalization)
이로인해 통성기도와 새벽기도가 시작된다. 또 한국교회의 조직화가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립노회(독노회)를 만드는 계기가 된다. 이를 ‘독노회’라 한다.

또 선교를 시작하게 되는데 제주도가 첫 선교지였다. 이기풍 선교사가 처음으로 제주도에 갔다. 평양대부흥운동이 가져온 부정적인 시각-실증적인 사관. 당시 평양대부흥운동은 종교적인 카타르시스를 통해 민족적인 저항의 힘을 약화시켰다.

백만구령운동이 1909년, 서양선교사에 의해 시작됐다. 당시 조선은 1천만 인구에 크리스천은 20만 이었다. 백만구령운동은 참여자들이 문서로 찬양으로 봉사했다. 날연보가 있었으며 권찰제도가 시작됐다. 권찰제도는 사무엘 모펫선교사가 필라델피아에서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것으로 1명이 10명을 돌보는 제도이다. 나중에 불신자까지 돌보는 제도로 발전한다.

하지만 백만인구령운동은 부정적인 시각이 많다. 왜냐하면 선교사가 나라가 어려운 기회를 이용했다는 시각과 한국백성이 무엇이 필요한지를 살피지 못했다는 시각 때문이다.

-정리: Stone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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