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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 논쟁을 통해 본 예루살렘교회

60년대 초기 수난사화를 산출하기까지 예루살렘교회는 예수전승을 남기지 않은 듯하다. 

그렇다면 주후 40년대와 50년대 예루살렘 교회 역사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실마리는 존재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 가장 유용한 실마리는 바울의 갈라디아 논쟁이다.

바울에 의해 50년대 초반에 기록된 갈라디아서는 48~49년쯤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예루살렘 회의와 안디옥식탁 사건에 대하여도 생생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갈 2:1~15)

갈라디아서 2장 11절 이하에서 바울은 약 3년 전 안디옥에서 있었던 식탁사건을 회상하고 있다.
사람들이 보통 알기로 바울은 일방적으로 베드로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가했고 이후로 이 사건때문에 바울과 그의신학이 그리스도교의 ‘정통한’ 주류로 자리잡은 것처럼 인식돼 왔다.

이 본문은 오직 바울의 목소리만을 담고 있다. 바울이 느낀 의미만을 내포하므로 그만큼 일방적이다. 이 본문을 통하여 신약성서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보고 무엇보다 초기 예수운동을 복원하려면 바울 반대편의 입장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참고로 사도행전 15장도 이와 관련된 보도이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2장과는 많은 면에서 차이가 난다. 신약성서 시대의 교회역사를 재건할 때에는 바울의 증언을 중요한 자료로 삼는다. 사도행전은 보조적인 자료로만 사용한다.

바울을 따르면, 입장차이의 원인은 전적으로 베드로에게 있다. 그가 그 식탁교제에 참여하였다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물러가는 일관되지 못한 행동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함께 먹었다’를 뜻하는 헬라어는 미완료형태로서 이는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탁교제를 나눈것이 ‘반복적’이고도 ‘일상적’이었음을 반영한다. 하지만 그가 어느 순간에 ‘물러났고’ ‘또 스스로를 구별시켰다’. 이 표현은 베드로의 전술적 행위를 전제한다. 즉 베드로의 신념으로는 이방인들과 함께 식탁교제에 참여하는 것이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는 의미를 내포한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그 식탁으로부터 물러나 스스로를 구별시킨 것은 다분히 ‘제의적’이란 종교 이념아래 고도로 제도화되어 있는 유대교적 식탁교제법을 의식한 행위이다.

참고로 주전 400년경 에스라의 종교개혁 이후, 제의적 정결은 유대교의 궁극적인 종교적 이념으로 자리잡는다. 이것은 헤스모니안 왕조 이후 에세네파(쿰란파), 바리새파, 사두개파 등의 여러 다양한 종파에서도 공통된 현상이며, 주후 70년 유대전쟁 이후 바리새 종교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베드로의 이러한 행동변화는 자신의 불가피한 상황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바울이 제시하듯 베드로는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을 의식하고 있다. 
베드로가 활동하는 주요 사역지는 동일한 헬레니즘세계의 유대교적 예수신앙인이었던 것 같다. 베드로는 유대교의 예수운동과 이방인 그리스도교의 두 사이에 서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안디옥에서의 이 사건은 최근 몇년간 예루살렘교회의 유대적인 그리스도교 공동체갈라디아교회의 헬레니즘적 그리스도교 공동체 사이에 있었던 좀 더 큰 상황 속에서 읽어야 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자신의 연대기적 전기안에 세개의 중요한 매듭을 소개한다. 그것은 
1. 바울의 소명(갈 1:15~17)
2. 3년 후 바울의 첫번째 예루살렘 방문(갈 1:18~24)
3. 14년 후 예루살렘 회의 때다.(갈 2:1~10)

참고로 박응천 교수는 베드로가 고넬료 사건(사도행전 10~11장)을 통해 헬레니즘적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의 ‘세계 보편주의 사상’을 갖기 시작했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갈라디아서 1장 15~17절은 시사하는 점이 많다. 
여기에서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자신보다 먼저 ‘사도’였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바울이 입증하고자 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복음이 예루살렘측에 종속되지 않고 독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울의 종교는 이렇게 다르게 기원했고 독자적으로 형성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바울이 갈라디아서 1장 18~24절에서 게바(베드로)와 야고보를 언급하는 대목에서도 드러난다.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바울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갔고 15일동안 게바와 함께 지냈다. 이때 바울은 다른 아무 사도도 보지 못하고 주의 형제 야고보를 만났을 뿐이라고 한다.

바울이 베드로와 야고보를 언급하는 이유는 자신의 적들이 예루살렘 회의에서, 안디옥 식탁 사건에서, 그리고 지금 갈라디아교회에서 계속적으로 베드로와 야고보의 권위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이 본문은 예루살렘교회의 초기역사에 관해 시사하는 바가 있다.
바울이 소명을 받은 이후 3년만에 처음 예루살렘에 갔을 때, 그는 베드로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예루살렘교회의 확고한 지도자는 ‘그 열둘’ 또는 일부인 베드로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주후 30년대 말엽 예루살렘교회에서 ‘그  열둘’의 지도력은 아직 확고하며 또 야고보도 서서히 부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 이제 14년 후 예루살렘 회의 모습을 살펴보자. 

갈라디아서 2장 1~10절에 있는 이 본문은 세 부류의 집단이 개입돼 있음을 볼 수 있다.
1. 안디옥교회를 대표해서 바나바와 바울이 파송되었다.
2. 아직 율법을 지키며 예수의 말씀안에 있던 우대교적 예수신앙을 대표하는 ‘가만히 들어 온 거짓 형제들'(갈 2:4)이 있다.
3. 비교적 온건한 입장으로 회의를 주재했던 ‘주의 형제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이 있다.

이들은 유대교와의 관계에서 나름 독특한 신학적 입장을 가지며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 세계는 통일된 교리체계나 일사분란한 조직체계를 가진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갈래로 여러 공동체가 신학적 색깔을 내는 복합적 현상이었던 것이다.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회의의 결과는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교회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교차 승인이었음에도 그것은 우선 안디옥 측의 승리였다.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 곧 ‘기둥들’이 같은 예루살렘교회의 ‘거짓 형제들’을 버리고 바나바와 바울편을 택한 것이다. 

이 회의가 바울의 첫 예루살렘 방문 후 14년 만의 일이므로 이방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매우 발전했을 만한 시간적 길이는 충분하다.

갈라디아서 2장 7~9절은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에 대해 함축하는 바가 크다.
8절에서 베드로의 사도직을 언급하지만 바울에게는 침묵한다는 점과
9절에서 그 유명한 자들 세사람은 ‘기둥들’이란 칭호를 받지만 바나바와 바울은 아무런 칭호를 받지 못하는 점을 주목하면 이 회의가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한 것 같지는 않다.

참고로 연세대 서중석 교수도 바울이 그 회의에서 사도직을 인준받지 못했다고 전제한다. 그는 갈라디아서의 예루살렘 회의 보도가 ‘합의 사상을 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이방선교활동을 차단시키기 위한 것’이라 규정한다.

갈라디아서 1장 18~19절에 반영된 바 바울의 첫 예루살렘 방문 당시 예루살렘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받던 권위자는 베드로였고 ‘주의 형제’ 야고보의 이름은 베드로의 이름뒤에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주후 48년경 예루살렘 회의에서는 ‘주의 형제’ 야고보, 베드로, 요한의 삼두 체제가 지도부를 형성하고 있다. 더구나 이름의 목록은 야고보를 베드로와 요한보다 앞세우고 있다. ‘주의 형제’ 야고보의 권위가 베드로와 요한 등 예수를 직접 따르던 자들을 앞지르는 인상이다.

이와 관련해 ‘주의 형제’ 야고보의 정치력에 주목할 구절이 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유독 누가는 베드로가 단지 바나바와 바울의 입장을 찬성한 사람에 불과하고(7~12절) 사실상 이 회의를 주재한 사람은 바로 야고보였다고 보도한다.(13~29절)
야고보의 주도권을 강조하는 누가의 이러한 보도는 역사적으로 사실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불과 몇 달 후 발생한 안디옥사건에서 이미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떠나 실정해 있고 오히려 야고보는 훨씬 강한 모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 논쟁을 통해 드러나는 바 예루살렘교회의 ‘유대교적’ 성격은 신약성서의 다른 전통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70년 경에 기록되었을 마가복음은 ‘그 열둘’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러한 평가는 제의적 정결문제에 있어 마가 자신의 입장이 반영돼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유대교적 정결법을 지키는데 관심이 있다. 예루살렘교회가 예수운동의 나머지 갈래들과 매우 다르게 ‘유대교적’ 신학을 갖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본래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가 막상 예루살렘 회의가 열리게 되었을 때 예루살렘교회는 두 입장으로 양분된다. ‘기둥들’과 ‘거짓형제’의 입장이다. 이때 야고보와 베드로는 신학적으로 큰 차이점을 갖지 않았다.

베드로는 늘 이방인과의 식탁교제에 참여하고 있다. 신학적으로도 자유롭고 관행적으로도 분방하다. 그러나 베드로는 안디옥 사건에서 보여 주는 바, 자신의 신학적 소신이나 처음 행동과 달리 유대교적 엄격주의로 회귀하고 있다. 이런 입장 변화는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의 엄격한 감시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갈라디아서 2장 4절의 ‘거짓 형제들’과는 다른 사람일 것이다. 이제 베드로와 야고보는 신학적으로 다른 궤도를 가고 있는 것이다.

‘야고보의 사람들’은 예루살렘 회의 때의 ‘거짓 형제들’과 동일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야고보와 예루살렘 예수운동의 ‘강성화’로만 설명될 수 있다.

이러한 변화가 베드로의 자유로운 신학과 분방한 관행을 위축시킨 셈이다.

예루살렘 예수운동의 지도력이 베드로로부터 야고보로 이행한 것은 ‘그 열둘’의 완연한 쇠퇴를 의미한다. 반면 그 열둘의 대표인 베드로는 헬레니즘 세계의 디아스포라 유대 사회로 전향하게 되었다.

예루살렘 초기 예수운동의 역동적 삶의 측면들 한복판에는 안디옥의 식탁에서 아파하며 고뇌하는 베드로의 잔상이 서려 있다.

Stone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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