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기자수첩 » [기자수첩] ‘예수운동’을 읽고(1)

‘예수운동’은 지은이 조태연이 1996년에 대한기독교서회를 통해 출판한 책이다. ‘그리스도교 기원의 탐구’란 부제가 붙어있다. 

참고로 대한기독교서회는 기독교계열 출판사이자 연합기관으로 기독교대한감리회,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기독교대한성결교회, 한국기독교장로회, 대한성공회, 구세군 대한본영, 기독교대한복음교회,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등이 참여하고 있다. 

‘예수운동’은 20년 전에 출판됐지만 지금도 예수운동의 본질을 탐구해 가는데 필요한 이유는 성경을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강조점을 따라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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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복음의 본문은 예수운동의 여러갈래를 역사적으로 복원하는데 적잖이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러한 노력의 배후에는 두 사람의 거인 신약학자인 제임스 로빈슨과 헬뭇 쾨스터가 있다. 쾨스터에 따르면 초기 그리스도교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믿는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의 케리그마를 오직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얻는다’는 획일적 신앙/신학 유형에  집착한 것이 아니라 좀 더 다양한 신학적 스펙트럼을 찬연하게 연출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 쾨스터는 구전의 예수전승과 신약의 완성된 복음서들 사이에 증간 단계의 기록된 문서가 존재했다고 말한다. 

-바울의 성만찬과 마가의 최후만찬

그리스도인들이 늘 친숙하게 대하는 성만찬의 경험과 그 이야기는 바울의 고린도전서 11장 23~26절마가복음 14장 22~25절이 대표적이다. 

요한복음 성만찬에는 예수의 말씀이 없다. 하지만 요한은 마지막 식탁에서 발씻음의 제의(ritual)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포함하고 있다. 누가의 성만찬은 바울과 마가의 본문을 종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최후의 식탁에 관한 가장 오래된 전승은 고린도전서 11장과 마가복음 14장이 된다. 

바울이 성만찬의 기원을 예수의 역사성에서 찾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의 마지막 만찬’이라 하지않고 ‘주의 만찬’이라고 표현하는데서 나타난다.(고전 11:20) 더욱이 바울은 그 마지막 만찬에 누가 참여하였는지를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바울이 예수의 역사성에 침묵하는 반면, 마가는 ‘저희가 먹을 때에’라는 도입구로 시작함으로써 예수의 역사성에 호소한다.   

바울의 본문에는 ‘나를 기념하여 ‘ 이것을 반복 시행하라는 제정의 말씀이 있으나 마가복음에는 이 명령이 없다. 마가에게 이 사건은 단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누신 마지막 식탁일 뿐이다.  따라서 마가는 이 사건을 성만찬의 신화적 기원으로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제자들과 식탁을 나누셨다는 주제를 절정으로 소개한다. 

이 사건은 교회 공동체가 거룩한 식탁을 반복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니누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주는데 그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열둘의 오해를 극화시키는 문학적 전략에 그 의미를 두는 것이다. 

바울과 마가의 또 다른 차이점은 바울의 본문에서만 선포의 명령인 ‘전하라’는 말씀이 주어진다는 점이다. 26절의 이 말씀은 25절과 달리 ‘주님’이 3인칭으로 등장하므로 바울이 받은 전승에 포함되었다기 보다 바울 자신의 말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바울의 종교 및 헬레니즘 세계의 기독교 공동체들은 적어도 외형상 그리스 밀의종교(mystery religious)와 여러 유사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마가복음이 제시하는 바 기념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 몸에 기름을 부어 장례를 준비한 그 여인의 행위이다.(막 14:3~9) 최후 만찬의 본문에서 ‘나를 기념하여'(고전 11:24,25)란 단어를 삭제한 마가는 그 동일한 용어를 바로 그 여인의 행위에 적용한다.(막 14:9) 마가복음에서 기념할 것은 더 이상 그리스도의 죽음이 아니다. 

바울의 마가의 차이점은 떡과 잔에 대한 신학적 강조에서도 나타난다. 

바울은 그가 떡을 가리켜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라 해석한다. ‘너희를 위하는’이란 구절은 기존 전승에 대한 바울의 첨가이다. 바울은 이미 고린도전서 5장 7절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으로 해석하였다. 바울은 이 공동체 식사를 순교자의 죽음으로 해석하고 고린도교회 성만찬은 이내 순교자 신화의 빛안에 놓인다.

여기서 바울 및 그의 공동체들이 갖는 케리그마 신학이 나타나고 있다. 그는 ‘십자가에 못학힌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으며'(고전 1:23)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전 2:2)고 한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바울 종교의 기원이 다메섹 도상의 체험에 있는 것과 긴밀히 연결되는 듯하다. 

케리그마의 주인공은 언제나 ‘예수’가 아닌 ‘그리스도’ 칭호안에 나타난다. 물론 죽음과 부활의 그리스도 케리그마는 농경문화에서 곡식의 추수와 재생의 패턴을 따라 한 젊은 신이 죽고 부활하는 극적인 사건을 핵심으로 하던 헬레니즘 세계의 밀의종교를 본받은 것이다. 

바울은 그 자신이 ‘받고 전한’ 전승을 말할 때 그것은 인용하는 경우가 고전 11장 23절과 15장 1, 3절의 두 본문뿐임을 확인하면 더욱 의미심장하다.

마가의 본문에는 예수께서 누군가를 위하여 주시는 것은 더 이상 떡이 아니라 잔이다. 마가는 떡의 말씀에서 의도적으로 ‘너희를 위하는’이란 표현을 삭제한다. 대신 마가는 이와 유사한 말을 잔의 말씀에 붙인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막 14:24) 신학의 강조점이 바울의 떡과 몸으로부터 잔과 피로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마가는 주도면밀하게 그리스의 밀의 종교적 누앙스를 제거해 나가고 있다.

바울의 본문에서 그리스도는 떡을 축사하고 잔을 축복한다. 그러나 반대로 마가의 본문에는 예수는 잔을 축사하시고 떡에 대하여는 축복할 뿐이다. 마가는 케리그마적 흔적을 유지하면서도 그것은 바울이나 그의 전승에서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을 구속의 케리그마 사건으로 이해하기 위함이 아니다.

바울의 본문에서 중요한 상징들 특히 떡과 몸이 수난과 부활의 케리그마에 집착하는 것과 달리 마가의 본문은 케리그마의 흔적은 가지나 제자도 명령(삶의 규범)의 신학적 의미에 더욱 주력한다.

따라서 마가의 최후만찬 이야기는 당시 헬레니즘 세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의 한 전형인 바울의 성만찬 이야기와는 여러점에서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바울의 복음에 의해 억압된 예수전승과 예수운동에 대한 독자적인 연구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바울의 실천신학과 마가의 예수신학

바울의 경우는 비교적 헬레니즘 세계의 밀의종교적 흔적을 보임으로써 바울 종교가 헬레니즘 세계에 토착화 되어 감을 반영하고 있다. 고린도교회의 성만찬은 헬레니즘 세계 연합체들의 공동식사를 모델로 하고 있다. 일찍이 바울의 성만찬 본문에서 헬레니즘 세계의 밀의 종교적 흔적을 찾은 사람은 알버트 슈바이처이다. 

바울은 오히려 공동체 밖의 밀의 종교적 식탁교제가 ‘귀신의 식탁’과 ‘귀신의 잔’이며 따라서 귀신과의 식탁교제라고 규정한다. 바울이 의식하는 바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모임에 관한 것이고 특히 공동체의 분쟁과 편당에 관한 것이다. 

바울의 성만찬 전승 인용에는 다음과 같은 신학적 논리가 전제되어 있다. 
(1) 떡은 그리스도의 몸이다. 
(2) 떡을 먹음은 그리스도의 몸을 먹음이다. 
(3) 따라서 떡을 먹음은 나와 그리스도의 신비스런 합일을 통해 그의 참여하는 거룩한 코이노니아이다. 
(4) 누구나 그리스도의 한 몸을 먹고 그의 육체에 신비하게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많으나 한 몸이다'(고전 10:17)그러므로 이거룩한 식탁에서 공동체의 하나됨을 깨뜨리는 자는 마치 그리스도의 몸을 더럽히는 자와 같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첫 편지에서 이 만찬 전승을 언급하는 것은 고린도교회안의 분쟁과 편당이라는 실제적인 문제에 접근하기 위함이다. 그 한 결과가 소위 ‘몸 사상’의 발전으로 나타나고 있다. 성만찬에 대한 바울의 편지와 신학은 이렇게 교회공동체의 현안문제에 대처해 나가는 한 방편인 셈이다.

마가의 본문은 잔에 관한 말씀과 상징에 더욱 신학적 비중을 싣고 있는 셈이다.

즉 마가복음 14장 17~25절에 있는 말씀은 25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는 포도나무에서 난것을 다시 마시지 않으리라, 내가 그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25절)-을 위한 상황설정에 불과하다. 

바울의 본문이헬레니즘세계 바울 공동체들의 거룩한 공동식사(특히 고린도교회의 만찬 관행)의 기원에 관한 것이라면 마가의 본문은 수난사화의 출발점으로 기능하고 있는 셈이다. 

마가는 자신의 본문(14:17~25) 안에서 왜 그 ‘잔’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는가?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이야기에서 예수는 운명적 순간을 맞아 부르짖는다.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 (14: 35~36) 마가의 예수 이야기에서 ‘잔’의 상징은 참혹한 수난이요 죽임당함이다.

마가복음의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렇게 마셨던 죽음의 ‘잔’을 지금 마시도록 마가동동체에 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운명속에는 마가 공동체의 운명이 드리워져 있다. 마가 공동체는 자신들이 처해있던 환난과 핍박의 절박한 상황속에서 이러한 ‘잔’의 상징을 발전시켰을 것이다.

마가 공동체의 이러한 사회적 정황을 잘 드러내 보이는 본문은 13장이다. 안으로는 적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주의자들의 열광주의자가 미혹하고 있으며 밖으로는 유대교회와의 격렬한 대립관계에 놓여있다.

신학자며 목회자인 마가는 공동체에게 직접적으로 그들의 문제를 지적하거나 그 길을 걸으라고 직접 명령하지 않는다. 그저 예수께서 일찍이 ‘아득한 신화의 세계에서’ 그렇게 행하셨고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셨으며 또 그렇게 운명을 결정하셨다고 이야기할 뿐이다.

초기 그리스독교 공동체들의 거룩한 만찬에 대한 예민한 관찰은 바울 신학을 절대 규범으로 하는 획일성이 아니라 무지개 색만큼이나 찬연한 신학적 다양성을 우리에게 펼쳐준다.

바울의 편지들은 주로 자신이 창설한 교회 공동체들의 현안문제들에 대하여 직접적이고도 실천적인 접근이다. 말하자면 ‘실천신학’이다.
반면에 복음서들은 저자들이 속한 교회공동체나 그 현안 문제들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일이 없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함으로써(고후 5:16) 예수에 대한 역사적 관심을 포기하고 있다. 예수가 언제, 어디서, 왜, 그리고 무엇을 가르치고 행하셨는가 하는 점은 차치하고 ‘그리스도’가 지금 나와 교회에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점에만 몰두하는 신학방법론이다. 

‘은총으로 말미암는 의’를 외치며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주장하는 바울의 신학이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부라고 단일화 할 수 있는가? 

바울이 주후 50~56년 그리스도 사건에 호소하는 ‘실천신학’이었다면 주후 70년 경 이후에 기록된 마가복음 및 그 외의 복음서들은 예수의 역사적 사건에 호소하는 전기적 ‘예수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요청되는 것은 마가복음으로부터 역사적 예수(주후 30년경)에 이르는 그 잊혀진 40년에 대한 탐험이다. 그러나 이 실험은 경직된 그리스도인들이 그 결과를 놓고 고뇌할 수밖에 없는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게 할지도 모른다. 

Stone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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