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기자수첩 » [기자수첩] 기독교공동체의 성서적 기원…(2)

기독교공동체의 신약성서적 모델에 관해 저자는 쿰란공동체와 테라퓨테공동체를 먼저 언급한다.

쿰란공동체는 1947년 사해사본이 발견되면서 본격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쿰란공동체는 키르벳 쿰란지역에서 주전 2세기 중반부터 주후 68년 경까지 둥지를 틀고 자생적인 살림을 경영해온 집단이다. 이 공동체의 주인공들은 요세푸스가 전하는 당시 이스라엘의 4대 종파 중 하나였던 에세네파 사람들로 알려져 있다.

플리니우스의 증언, 요세푸스와 필론의기록, 고고학적 성과 등을 종합해 볼 때 키르벳 쿰란은 곳곳에 산재하는 에세네파 공동체의 핵심본부가 위치한 곳이었으며 그들이 사해사본의 생산을 주도한 당사자들이었다고 보는 것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들 가운데는 바리새파의 모체가 되는 하시딤(Hasidim)이라 불리는 경건주의자들도 있었다. 이들의 기본적인 사상은 자신들을 종말론적 공동체의 주역으로 인식하면서 ‘가난한 자들’ ‘거룩한 자들’ ‘빛의 아들들’ 등으로 규정하고 반대로 세속의 종교권력에 물든 적대세력은 ‘어둠의 아들들’로 정죄하는 이분법적 사유패턴에 익숙하였다.

이들은 영혼의 불멸함을 자신들의 교리로 받아들였는데 현세의 고행은 내세의 소망으로 직결된다고 믿었다. 이들은 플라톤주의의 영육 이원론적 사고에 익숙하였고 타고날 때부터 영혼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결정론적 신념을 견지하였다. 참고로 이러한 선악 이원론과 관련해서는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에서 그 기원을 찾는 학자군과 유대교 자체내에서 그 기원을 찾는 학자군으로 나누어진다.

쿰란문서에서 종말론은 전쟁규울문서(IQM)에 주로 집중되어 나타나는데 쿰란공동체의 메시야는 하나가 아니라 정치적 메시야와 제사장 메시야로 둘인 점이 특징적이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전통을 중시하였고 하나님 다음으로 존경할 것을 요구하였다. 모세를 비방하는 자들을 사형에 처하는 규율이 전해질 정도였다.

이들은 긴박한 종말의식을 가지고 살았지만 매일 오전, 오후 두차례 자신들의 일거리를 찾아 자급자족하는 생활에 몰두했다. 그들은 종말신앙을 앞게워 생업을 포기한 자들이 아니었고, 묵시적 환상을 내세워 혹세무민하거나 심리적으로 우왕좌왕하는 무리들이 아니었다.

이집트의 테라퓨테공동체는 고고학적으로 검증된 적이 없다. 오로지 문헌상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이 저작한 책의 한부분에서 공동체의 존재를 규명해 줄 뿐이다. 필론의 저작에 따르면 이집트의 테라퓨테공동체는 주후 1세기 당시 프톨레미 이집트의 수도였던 알렉산드리아 부근 마레오티스(Mareootis) 호숫가에 정착한 유대교 금욕주의 종파로 추정된다.

그들은 치유기술로 유명했는데 항간의 의술이 육신의 질병을 치료하는데 한정되었다면 그들은 영혼의 치유까지 담당하여 생명의 통전적 건강과 불멸하는 영혼의 천상적 삶을 추구하였다. 그들은 한곳에 정착하는 걸 고집하지 않고 안전에 적합한 다른 곳으로 순례여정을 떠나면서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기도 했다.

유세비우스는 이 테라퓨테공동체를 기독교 수도원공동체 운동의 가장 초기 형태로 확신하였다. 좀더 특이한 관점은 이 유대인 공동체가 고대 인도의 아쇼카 황제가 파송한 불교 선교사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당시 고대도시 알렉산드리아는 이미 주전 250년경 불교 선교사들의 활동무대였다. 나아가 주후 1세기경에도 인도와 이집트는 왕성한 무역활동과 함께 문화적 접촉을 이루고 있었다.

다음은 예수운동과 제자공동체에 대한 내용이다.

마가복음의 경우 공동체 연구자료로 사용한다는 것은 마가복음 저자가 자신의 자료에 주관적 상상력을 보태어 작문한 것이 아니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런가 하면 Q문서가 단일한 버전이 아니라 각 복음서마다 부분적으로 상이한 전승자료를 담고 있었던 것으로 추론하기도 한다.

한 복음서를 쓴 저자가 개인이라고 해서 그가 공동체와 무관한 채 독립적으로 활동한 천재적인 또는 문제적인 개인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억측이 될 것이다.

타이센은 마가복음이 기적이야기와 수난이야기를 중심으로 수집하여 나름의 각색을 통해 공동체 내의 합의를 창출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계통의 수집과 전통은 마가복음이 유대전쟁이 임박한 시기에 기록되었으며 그 결과 마가복음은 로마제국과의 관계에서 로마 황제의 복음에 대한 ‘반복음’으로서 정치적 역학관계를 방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타이센은 특히 Q와 달리 마가복음만이 어린이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이것이 지역공동체가 지역내에서 권위를 갖기위한 우선적인 기준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로써 타이센은 마가공동체의 반 계급적분위기를 반영한다.

또 타이센은 마가복음 10장의 ‘마가공동체의 순례적 성격’을 드러낸 것은 주후 66년에 발발한 유대-로마 전쟁에서 자신의 가족과 재산 모든 것을 잃은 처참한 상태에 처한 마가공동체 구성원들의 순례자적 삶의 자리를 반영한다고 보고 있다.

마태복음은 전통적으로 가장 오래된 복음서로 인정받아 왔다. 그러나 성서비평의 성과로 마태복음은 마가복음을 기초로 하여 서사적 틀을 삼고 예수의 어록을 취합한 자료인 Q와 마태의 특수자료를 편집하여 생산된 복음서로 자리매김하였다. 그 저작연대를 정확히 산출할만한 근거는 없지만 유대전쟁이 끝난 뒤 대략 80~100년 사이의 어느 시점일 것으로 추측된다.

타이센은 마태복음의 저자가 예수를 토라의 진정한 해석자로 제시함으로써 ‘기독교가 진정한 유대교’라는 믿음을 구축하고자 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타이센은 마태복음이 유대적 기독교 전승을 주축으로 이방적 기독교 전승을 통합한 결과로 평가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마태복음의 저자는 마가복음의 기적 이야기를 축소하고 말씀의 어록은 풍성하게 채워 넣었다는 것이다.

타이센은 4복음서 중에 마태복음에서만 유일하게 ‘에클레시아'(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한데 대해 당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함께 이미 분리된 유대교와의 윤리적 경계를 설정하면서 독자적인 공동체 성원으로서 정체성이 강화돼 나타나는 것으로 해석한다. 즉 마태의 에클레시아는 유대인들의 회당공동체와 대립된 긴장관계 속에서 토라의 정통적인 해석자로서 서로 경합을 해야 했던 현실로 보고 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의 5대 연설로 알려진 산상수훈(5-7장),  파송설교(10장),  비유들(13장), 공동체의 화해와 결속을 위한 교훈(18장), 종말론적 강화(24-25장) 등 예수의 연설이 많이 나온다. 이 모든 연설은 예수를 새로운 모세의 위치에 세우면서 토라의 권위있는 해석자로 묘사할 뿐 아니라 천국을 목표로 삼은 마태공동체의 유일한 지도자로 제시한다는 것이다.

타이센은 마태공동체의 기본입장이 반유대주의를 표방하기보다 기독교가 진정한 유대교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고 본다. 저자는 이는 마태공동체가 여러 전통을 수렴하면서 겪어 온 역사적 경험의 응축된 산물이었을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는 의사로서 바울의 선교여행에 동행하면서 중요한 동역자로 활동한 것으로 여겨진다. 바울은 말년을 회고하는 디모데후서에서 이전 동역자들인 데마, 그레스게, 디도가 자신을 떠난 상태에서 누가만이 자신과 함께 있다고 한 진술은 바울과의 관계에서 누가가 차지한 특별한 위상을 후대에 반영한 결과로 볼 수 있다.

하여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내용과 그 신학적 관점, 시대적 배경 등을 분석하여 이문헌의 저자를 바울의 사후 한 세대쯤 지난 뒤 마태복음과 비슷한 시기에 예수의 전통과 사도들의 전통을 군형있게 집필한 또 다른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누가를 실제 저자로 인정하느냐, 후대의 저자를 상정하느냐에 따라 누가복음/사도행전의 저작연대는 바울의 수감으로부터 마르키온의 증언에 이르기까지 주후 60~150년 사이로 탄력적으로 비정된다.

요컨대 마가와 마태가 한 권의 책에서 시도하고자 한 공동체의 삶이 누가의 경우에는 두 권의 연속적인 역사적 전승을 통해 반영되어 있는 셈이다. 누가공동체의 단면을 짚어볼 수 있는 것으로 누가의 구원사관을 들 수 있다. 누가의 구원사관은 이스라엘 시대–>예수시대–>교회시대로 역사를 정확하게 구별하는 기초위에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사관의 밑바탕에는 예수의 재림이 지연된 것에 대한 신학적 변증이라는 대응전략이 개입되어 있었음을 암시한다.

타이센의 교회정치학적 분석에 따르면 누가공동체는 다섯가지의 복합적 맥락에서 그 삶의 자리를 꾸려왔다.

첫째 누가가 누가/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초대 기독교의 다원성을 통합적인 차원으로 수렴함으로써 내부적인 합의를 창출하기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율작업을 통해 누가는 자신의 기독공동체가 세상의 한구석에서 비롯된 우발적인 해프닝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땅끝까지 확장될 역사의 보편적 사건임을 증언하고자 했던 것이다.

둘째 공동체의 외부관계를 설정함에 있어 누가는 로마제국과 그 하청권력에 대해 ‘정치적 실용주의’의 입장을 취함으로써 복음선교의 현실적 탄력성을 확보한 것으로 평가된다. 전통적으로 누가/사도행전은 당시의 세계를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정치적으로 체제를 위협하는 해로운 것이 아님을 변증하기위한 기독교 변증서의 위상을 지녔음을 강조해왔다.

셋째 누가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분리된 정체성을 강화해 나가는 전략을 구사하는데 이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사이의 점진적 결별이 가시화된 공동체의 상황을 단적으로 반영한다. 이방인 선교과정에서 발생한 할례를 비롯한 율법준수 문제에 대해 누가는 사도행전 15장에서 이 두그룹 사이에서 화해와 타협의 결과인 양 사도칙령을 공표한다. 누가는 당시 유대교의 회당체제를 근본적으로 부인하지 않으면서 궁극적으로 역사적 결별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이 전진적인 구원사의 전개 과정과 맞물려 진행되었음을 암시한 것이다.

넷째 공동체 내부관계를 설정하면서 누가는 자신의 공동체 내에 다양한 사회적 계층을 통합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흔히 누가복음의 특징을 논할 때 저자가 가난한 자들과 소외 계층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하지만 타이센은 이는 누가공동체의 일면만 파악하고 또 다른 중요한 점을 간과하고 있다고 밝힌다. 타이센은 상류계층에 대한 누가의 신학적 윤리와 가난의 윤리에 대한 누가의 친밀성 사이에 긴장이 있다고 해석하는데 바로 이런 특징이 다양한 사회계층의 통합을 위해 필요했다는 것이다.

다섯째 공동체 내부의 권위구조와 관련하여 누가는 방랑하는 카리슴적 지도자들로부터 지역공동체의 지도자들로 그 리더쉽이 전이되는 변화를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이양자그룹 사이에 생계 후원 체계에 있어 일정한 갈등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이 지역교회의 후원으로 생계를 유지한 데 비해 ㄷ지역공동체의 새로운 권위자들은 자신의 노동으로 생활을 유지해 나갔기 때문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 마술사 시몬 마구스의 이야기(행 8:19)가 시사하듯 혈통가족의 부양에 대한 각자 책임은 강조하면서 가족모델을 공동체의 근간을 삼음으로써 자비량으로 선교하고 무보수로 공동체를 섬기는 직책과 직분의 정당성을 옹호한 것으로 드러난다.   이는 누가공동체가 당시 로마제국의 권력분배 제의에 타협한 그룹과 비폭력적 항거와 고난의 길을 선택한 그룹으로 나뉘어 갈등했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요한복음의 경우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대한 일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할지라도 요한공동체가 지향한 목표는 분명 공관복음이 추구해 온 예수 이해와 신앙적 방향을 넘어서는 측면이 농후하다. 요한복음은 대체로 100년 전후 시점에에베소 또는 수리아 안디옥 등에서 생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요한공동체의 갈등요인과 관련하여 가장 완성한 지지를 받은 추론은 ‘회당출회설’이다. 집필에 즈음한 가까운 과거에 요한공동체가 유대교 회당에서 출교당하는 고통을 겪은 뒤 그 후유증을 다스리고 신앙을 격려할 목적으로 이복음서가 생산되었으리라는 것이 학자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출교의 직접적인 원인은 기독론의 차이로 추론된다. 즉 예수가 하나님과 동등한 것으로 믿는 기독론적 신념(요 5:18)이 회당내에서 마찰을 일으켜 출교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요한공동체의 출교와 관련된 역사적 배경으로 주후 70년 성전 파괴사건의 결과로 소급해서 추론하기도 하고, 90~95년경 유대인 회당에서 공포된 이단자들을 향한 공식적인 축도문의 강제실시를 꼽기도 하지만 요한공동체와의 세부적인 연결고리를 증거로 확보하기가 쉽지않다. 타이센은 요한공동체의 외부적 관계를 설정하면서 ‘이 세상의 지배자’로 묘사된 사탄의 정체를 당시 로마제국의 통치권력과 나란히 일치시켜 해석하였다.

그간 제출된 다양한 학자들의 분석과 해석을 종합해 보면

요한공동체는 유대교 회당과의 불화와 갈등이 빌미가 되어 종파적인 정체성을 띠면서 출범한 것이 사실같다.

그러나 이 공동체의 발전과정에서 애당초 창립멤버들의 관점에서 종족적 문화적 신학적으로 이질적인 외부세력과의 경계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포용성의 반경을 얼마나 확장시키고 배타성의 경계를 어디쯤에 그어야 할지 연속적인 고민과 결단의 과정을 경험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다른 우리의 양들’로 표상되는 이방인 그리스도교와 헬레니즘 사상의 흡수와 통합과정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아울러 그 흐름속에 예수의 선재설과 로고스 성육신론을 주축으로하는 고등기독론의 발전과 함께 이와 관련한 영적인 사색과 통찰이 극대화되는 과정이 개입되었을 법하다.

요컨대 요한공동체는 신학적인 이념형으로 설정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에 민감하였다. 그 결과 예수는 로마황제와 유대교의 회당체제는 물론 사마리아인을 천대했던 유대교의 신학적인 수준과 이방신들의 권위마저도 압도하는 초월적인 세상의 구주로 승격되었으며 그 권위의 고양과 비례하여 공동체의 안위와 기틀이 더욱 공고히 다져졌으리라 추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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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예루살렘교회 공동체와 바울서신에 나타난 공동체신학, 오늘날의 기독교공동체 등 중요한 내용을 계속 언급해 갑니다. 하지만 너무 길면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 주의력이 떨어질 것이므로 일단 여기까지 기록합니다. 기독교공동체의 역사를 조망해 보고 싶은 분이라면 일독을 권합니다.

도서출판 짓다는 SFC출판부의 인문교양 임프린트입니다.

Stone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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