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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 속에서의 일치: 중세유럽의 사회원리
김영일 교수(신라대학교 국제관계학과)

* ‘국제사회의 규범과 원리’라는 책속에서 발표된 김영일 교수의 글을 요약합니다.

오늘날 모든 국가 민족들이 그들의 사회를 되돌아보고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해 나가기 위해서는 서구적 패러다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는 곧 서구역사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서구의 역사를 논할 때 고민에 빠지게 되는 것이 바로 ‘중세’라는 시대 구분이다.

‘중세’, ‘중세적’, ‘중세인’이라는 말은 르네상스 이후의 혹은 중세 이전의 인문주의적이고 계몽주의적인 특성과 대비하여 경멸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고 이러한 의미가 상당부분 오늘날까지도 통용되고 있다.(르고프 1997년 p.19)

계몽주의라는 빛의 이름으로 등장한 근대사회가 암흑의 시기로 단죄했던 중세. 하지만 중세를 특징지웠던 그리스도교적 전통은 그 후로도 가장 특징적인 유럽적 정체성의 하나로 자리잡아 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유럽통합의 움직임과 토대, 그리고 동인은 단순히 현대사회에서 국제정치적 맥락에서만이 아니라 그 기원이 중세 유럽사회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이다. 폴란드, 헝가리, 체코가 유럽연합 가입과 관련된 논의에서 그들 스스로 오랜기간 유럽적 정체성을 간직한 나라임을 강조해 왔다는 점과 터키가 아직까지 유럽연합에 가입하지 못하고 있는 주 요인중의 하나가 문화적, 종교적, 지리적 정체성이라는 점이 이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강원택 2009 p.404)

이러한 논의를 통해 우리는 중세가 단순히 암흑의 시대라는 부정적 평가가 아닌 역사의 연속성 속에서 오늘날 유럽의 정체성과 흐름의 토대를 닦은 시기로 재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 이후 국가적 틀이 등장하기 전까지 유럽의 각 민족 혹은 국가들은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이 역사 공유 경험의 한 가운데 그리스도교의 정신과 질서가 존재해 왔다. 

그리스인들 스스로는 세계가 유럽,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로 나뉘어 있다고 생각하였고 그 속에서 유럽을 야만의 지역으로 간주하여 그리스적인 것과 구분하였고 이러한 생각은 로마제국에 와서도 계속 이어졌다.(김시홍 외 2006 p.16)

바라클로흐(G. Barraclough)는 하나의 정체성의 개념으로서 유럽의 자기인식은 로마의 붕괴 후, 특히 이슬람이라는 타자와의 만남과 함께 형성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Barraclough 1964 p.9~10)

중세시기에 관해서는 보는 시각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개 5~15세기 1천년으로 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중세의 시작은 대체로 AD 476년 서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폐위됨으로써 서로마제국이 몰락하게 되는 시점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푸어만은 중세를 규정짓는 특징은 무엇보다 그리스도교이며 따라서 중세의 시작은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그리스도교를 구교로 받아들였던 4세기부터 이미 시작된 것으로 이해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AD 313년 그리스도교를 승인하고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를 통해 교리를 체계화함으로서 가톨릭이 유럽에 뿌리내리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피렌느(Henri Pirenne)의 경우, 오히려 교황 레오 3세가 샤를마뉴를 서로마 황제로 대관한 800년을 중세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간주하였다. 그 이유는 이 사건을 그리스도교가 유럽대륙의 중심에서 공식적으로 승인되는 계기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는 지금의 스페인인 이베리아 반도까지 진출한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고 유럽을 이슬람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였다.

중세를 보는 이들 견해에서 한가지 공통된 요소를 도출해 낼 수 있는데 그것은 곧 ‘그리스도교’이다. 

역사에서는 결코 단절이 없으며 역사의 각 상황마다 나타나는 요소들은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서로 연결되어 상호작용을 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유럽의 고대를 구성하는 그리스, 로마제국과 중세는 서로 관련되고 있다. 중세가 고대와 다른 차이점을 보인 것은 바로 그리스도교와 게르만적인 것의 융합이었다고 볼 수 있다.

1천년이란 기나긴 시기는 그 자체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특성으로만 해석될 수는 없다. 그리스도교가 유럽의 정신적, 문화적 특성으로 자리 잡아가는 과정에서의 역할과 이에따른 사회적 변화에 따라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서양중세사학회 2003 pp.20~24)

중세의 첫번째 시기는 게르만의 이동에 의한 서로마제국의 몰락과 그 이후의 혼란기를 거쳐 프랑크 왕국 중심으로 유럽사회의 질서가 재편되는 시기이다.
로마교회와 프랑크 왕국의 동맹관계는 특히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가 교황 레오 3세로부터 황제로 대관을 받음으로써 교회와 세속적 국가가 하나가 되는 그리스도교적 유럽 정체정을 대변하는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카롤링거 왕조에 의한 단일적 유럽의 틀은 오래가지 못했다. 프랑크 왕국은 내부분열과 이민족들의 침입에 의해 붕괴되었고 베르됭 조약(843년)을 통해 오늘날의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전신이 되는 3개 국가로 분열되었다.

카롤링거 왕조하에서 그리스도교는 유럽의 보편적 정체성으로 자리매김되어 갔지만 교황의 지위는 세속권력에 대응할 정도가 되지 못하였다. 11세기 초까지만 해도 교황직은 하나의 주교직에 불과하였고 세속적인 문제가 아닌 신앙의문제에 있어서도 교황은 이탈리아 지역 바깥의 교회문제에 개입하는 경우는 드물 정도로 교황권은 무력하였다.(서양중세사학회 2003 pp.110~112)

아이러니컬하게도 교회의 세속화는 그리스도교가 황제의 종교를 넘어 분권화된 중세의 봉건적 질서 속에서 영주들과 그들이 지배하는 일반인들의 생활 저변으로까지 파고드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중세의 두번째 시기는 11~13세기의 시기로 유럽적 정체성으로 자리잡은 그리스도교가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시기이다.

그리스도교의 개혁운동은 먼저 클뤼니 수도원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 개혁운동은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 이르러 그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7세의 이러한 개혁은 교권과 속권의 대립을 불러 일으켰고 이 대립은 결국 밀라노 주교의 임명권을 둘러싸고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의 대결로 나타났다.

교권과 속권의 대립은 카노사의 굴욕(1077년)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결말을 맺게되고 이후 12~13세기를 거쳐 중세가 쇠퇴할 때까지 교황중심의 유럽 질서가 확립되어 갔다. 하인리히 4세는 자신의 세력을 회복한 이후 카노사의 굴욕을 잊지않고 로마를 점령하고 교황 그레고리 7세를 폐위시키기도 했다.(1084년)

교권과 속권의 대립에서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이론적 법적 근거가 필요했는데 이러한 근거는 이노센트 3세와 4세에 의해 정리되었다.
이노센트 3세는 예수가 베드로에게 교회를 위임한 것을 그리스도교 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종교적이며 또 동시에 정치적으로 해석하였다. 따라서 교황은 교회뿐 아니라 세속 모두를 구성하는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그리스도국가’의 개념을 정립하고 이의 수장으로서 교황을 주장하였다.
이노센트 4세는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모든사물과 사람에 대해 보편적 감독권을 갖는다고 주장하면서 교황이 교회와 세속의 모든 것을 통괄한다는 ‘단일 수장론’을 정립해 나갔다. 이러한 종교적 하나됨은 많은 희생과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여러차례에 걸쳐 십자군 원정의 토대가 되었다.

중세의 세번째 시기는 중세의 사회질서가 마침내 위기를 맞고 해체되는 14~15세기이다.

8차에 걸친 십자군 원정을 통해 봉건제 지배계급이었던 영주와 기사들이 몰락한 반면 농노들의 지위상승과 해방은 봉건제가 유지될 수 있는 사회적 토대를 무너뜨렸다. 이러한 현상은 14세기 당시 유럽 인구의 4분의 1을 희생시킨 흑사병의 창궐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십자군 전쟁이후 이탈리아에서부터 활성화된 상업은 유럽 전체로 확대되었고 이렇게 해서 성장한 상인 계급은 세력을 키워가던 왕권의 중요한 지지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사회변화와 함께 영국과 프랑스의 왕위계승을 계기로 일어난 백년전쟁(1337~1453년)은 유럽사회에서 서서히 성장해 가던 왕권의 강화를 넘어서서 중앙집권적 국민국가라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틀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중세 그리스도교 문명의 출발점은 카롤링거 제국이다.’라고 주장한 도슨(C. Dawson)의 말처럼 그리스도교는 카롤링거 왕조에 이르러 동방교회와 이슬람 등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이들과는 다른 스스로의 문화적 정체성으로 받아들여졌고 이 과정에서 카롤링거 왕조는 로마와 교황권 즉 그리스도교의 보호자로 그리스도교가 유럽의 보편적 정체성으로 뿌리내리는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바라클로흐는 카롤링거 왕조에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유럽정체성의 모든 기초가 형성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진정한 유럽은 오히려 카롤링거 왕조의 붕괴와 함께 시작되었다. 이처럼 카롤링거 왕조를 지나면서 유럽은 오늘날 유럽 정체성의 두가지 요소, 즉 ‘통일적 보편성’과 ‘다원적 개체성’의 두 개념을 확립시켰고 이후 두 특성은 오늘날까지 관통하는 유럽적 특성으로 주장되고 있다.

세속권력과 단절된 존재로서의 교회의 새로운 자기이해는 교회 내부 질서에도 변화를 가져와 로마 교황으로부터 독립되어 독자적 자주성을 가지는 수도원들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질서의 변화는 그리스도교 교리의 변화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유기체적 세계관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에 담겨있는 특성은 무엇보다 일치와 통일을 말하지만 그것이 획일성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레고리 7세에서 이노센트 4세에 이르기까지 교황권의 절정기에 재임했던 교황들은 하나의 세속적 제국이 아니라, 변화된 세속권력의 질서를 수용하였고 그 토대위에서 정신적 연대와 통일적 정체성을 추구해 나갔다. 이러한 중세적 질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십자군 전쟁이다. 중요한 점은 이 십자군 원정에서 많은 세속적 다양성들이 이슬람이라는 공동의 적에 대응하여 그리스도교적 정체성의 하나로 융합하여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유럽의 국가들이 통합을 추진할 수 있었고 또 통합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유럽의 동질성때문이었다. 이동질성은 무엇보다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와 중세 유럽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기독교가 그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중세 유럽의 특징으로 자리잡은 ‘다양성 속에서의 일치’라는 개념은 이후 중세가 몰락할때까지 그리스도교 문화가 중심이 되었던 유럽사회를 이끌어가는 이념으로 작용하였다.

이렇게 볼 때 중세라는 시기는 암흑기로 단절된 역사로서가 아니라 역사의 한 층으로서 과거를 새로운 방향으로 변화시키고 이를 토대로 근대 및 현대의 역사가 자라나는 연속성의 시각에서 새롭게 조망되어야 할 것이다.

Stone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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