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바울신학원 » ‘3.1운동과 기독교민족주의’-바울신학원

한국교회가 시작될 당시, 두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민중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신앙이다. 민중신앙은 만주쪽에서 의주상인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개인구원과 교회성장에 초점을 두었다. 민족신앙은 일본에서 시작돼 양반관료 지식층을 중심으로 독립자강을 외쳤다. 독립협회에서 신문을 만들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미국이 일본에 대해 간섭하지 않았던 이유는 러일전쟁에서의 승리, 가쓰라태프트 밀약때문이었다. 왜냐하면 영국과 미국은 대륙세력인 러시아를 견재하기위해 일본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조선에 있었던 선교사들의 입장은 중립적으로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했다. 당시 인천내리교회에는 독립협회가 있었고 장대현교회에는 안창호 선생이 있었다.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교회로는 서울 상동교회가 있었다. 담임목사이기도 했던 전덕기가 신민회에서 활동했으며 상동교회 소속이던 이준 열사가 헤이그에 파송되기도 했다.

신민회는 어떤 조직이었나? 신민회는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항일운동과 비밀결사단체였다. 안창호와 대성학교가 연결돼 있고 이승훈은 오산학교와 고리를 갖고 있다. 안창호는 평안남도 출신이다. 평양은 청일전쟁에서 심한 타격을 받았다. 안창호는 언더우드 선교사 밑에서 배움을 받는다. 안창호의 사상은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주장과 거짓이 조선을 망하게 했다는 주장, 모든 정파를 초월해야만 조선이 살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나중에 신민회는 임시정부가 된다. 신민회에는 김규식, 김구, 안창호, 이승훈 등 주요 4인이 몸담고 있었다. 이들이 민족주의를 이끌어 가는 주요인물이 된다. 일본은 백만인 구령운동을 일본을 대항하는 백만명의 군사를 일으키는 것으로 오해했다. 그래서 박해의 집중타킷은 신민회였고 이들은 평양대부흥운동의 영향을 입은 평양 사람들이 주를 이루었다.

‘105인 사건’중 95명이 개신교인이었다. 일본은 이들을 와해시키기 위해 70가지 이상의 고문방법을 동원했다고 한다. ‘105인 사건’은 3.1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선교사들은 105인 사건의 진상을 알게되자 변호사를 지원하고 세계언론과 여론에 알리미의 역할을 담당했다.

제암리 사건은 한국교회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1919년 3월 30일
3.1운동 후 일제는 57개교회에 걸쳐 교회를 불태웠다. 3.1운동의 원인은
일본의 무단정치로 인한 자유박탈, 민족성 말살, 토지와 차별의 문제 등이 원인이 됐다.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난 직접적 원인은 1차대전이 끝난 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들 수 있다. 민족자결주의 운동을 지지하는 주요세력은 독립운동가와 엘리트계층이대부분이었다. 또 3.1운동을 통해 파리강화조약에서 독립청원과 독립갈망을 청원하고자 하는 계획이 있었다. 가장 큰 원인은 고종의 사망이 국민적 감정을 크게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고종의 장례일인 3월 3일을 시위일로 정했으나 이날이 고종의 장례일이라는 이유로 취소되고 2일은 주일이었기 때문에 3월 1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3.1운동은 단계적인 계획을 갖고 있었다. 1. 선언서 낭독, 2. 파리강화조약에 청원, 3. 시위란 순서가 그것이었다.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기초했다. 최남선은 기독교인이란 기록은 없지만 선언서 정신은 기독교적으로 구성되었으며 자유, 평등, 박애의 내용을 담고 있다. 3.1운동의 행동강령은 1. 대중화 2. 조직의 일원화 3. 비폭력 등이었다. 이중 비폭력이 가장 기독교적인 사상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집회를 허용하는 그룹은 종교단체와 학교 밖에 없었다. 대부분 시위가 교회와 학교에서 많이 발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당시 기독교 전체인구를 20만으로 추정하는데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은 전체 인구의 1.5퍼센트 밖에 안됐다.

3.1운동에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동참이 눈에띈다. 모우리 선교사는 독립선언서를 영어로 번역해 알리고 학생들을 피신시켜 줘 징역 6개월 형을 받았다. 스코필드 선교사 제암리사건을 사진으로 남겼다. 언더우드는 미국 국회에 3.1운동의 실상을 알렸다. 사무엘 모펫 등 거의 모든 선교사가 도움을 주었으며 이러한 독립운동을 통해 서양 선교사와의 관계가 좋아지는 계기가 됐다.

3.1운동은 기독교 운동이었나? 우선 전체 참여자 20만 중 8만명이 기독교인이라는 점,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으며 독립선언서는 교회와 병원에서 등사했다. 그리고 청년과 여성이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이념 면에서 민족자결보다 비폭력을 강조함으로 기독교 사상의 실천을 보여 준 점을 들 수 있다. 3.1운동은 정치적으로 실패한 운동이다. 당시 뉴욕타임즈는 3.1운동에 반대했다.

하지만 3.1운동의 결과는 1.민족을 결집시킴, 2. 임시정부가 수립돼 내각의 8명 중 7명이 기독교인으로 구성됐다. 3. 일본은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변경됐다. 4. ‘기독교는 애국하는 종교다’라는 위상으로 바뀌었다. 즉 외래종교에서 조선의 종교로 바뀌게 된 것이다. .

신석구 목사는 3.1운동 이틀전에 33인 중 한사람으로 참여한 목사였다. 당시 33인에 들 것을 제의 받았을 때 ‘기도해 보겠다’라는 대답을 했는데 신 목사는 정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 3.1운동 이틀전에 기도응답을 받고 가담하게 됐다. 그리고 이후에도 적극적인 독립운동에 참여하다 나중에는 살해당하기까지 한다. 신 목사와 같은 이들을 3.1운동 등 민족운동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정리: Stone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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