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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원 한국교회사 ‘3.1운동 이후의 한국교회’ 강의가 4월 29일 뉴저지 포트리에 있는 바울신학원(원장 김동수 목사)에서 진행됐다. 강사인 석태준 목사(롱아일랜드 나눔의교회)는 한국교회는 무속종교와 불교, 유교가 혼합된 형태를 보이고 있다며 그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강조했다.

서양기독교가 한국에 전파되면서 두가지 방향이 있었다. 민중적 측면에서는 평양대부흥운동이, 민족적 측면에서는 3.1운동이 있었다. 그 이후에 진행된 한국교회의 특징은 무속종교와 불교, 유교의 특성이 가미된 신앙스타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한국기독교 영성의 뿌리는 무속, 불교, 유교적인 특성에 있다.

무속종교는 자연숭배와 정령신앙으로 특징 지어진다. 불교는 철학적이면서 신비적인 면을 갖고 있다. 지식층에 전파되었고 국가종교가 되었다. 신비적 차원에서 무속과 혼합되었다. 유교는 철학적, 현실적이면서 정치사회체계가 되었다. 이처럼 한국사람은 한 종교로 정의 할 수 없이 여러 종교가 혼합된 형태를 띄게 되었다. 

무속종교는 보이지 않는 영을 인식하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을 받아 들이는데 거부감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초월적 존재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점을 수용한다. 하지만 부정적인 면은 하나님을 소원성취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기복신앙의 바탕이 되었다.

성경의 하나님은 다른 종교와 달리 신과 인간이 직접 교제한다는 점이 특별하다. 따라서 무속신앙이 있는 지역에 복음을 전할 때는 그들을 바꾸려 하기보다 그들에게 적합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불교는 모든 악의 근원을 욕심으로 본다. 그래서 세속을 떠나 도를 닦는다. 한국에서 기도원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은 이러한 불교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불교는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기에 현실도피, 현실외면의 모습을 띄게 된다. 한국교회가 주일예배중심의 모습이 된 이유도 이러한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유교는 성경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 ‘경천애인’은 유교의 중심사상인데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 유사한 부분이다. 유교는 또 경전을 존경한다. 이것이 성경 말씀을 존중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성경공부를 하는 사경회도 유교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유교는 영적인 데 관심이 없다. 유교의 중심은 ‘효’인데 이는 하나님 중심이 아닌 인본주의로 흐르는 경향을 보인다. 이로인해 사람을 숭배하는 조상숭배를 강조하게 되었다.

한국기독교는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 점은 강조했지만 그 구원이 어떤 방향성을 가져야 하는 점에 대해서는 부족한 점을 지니고 있다. 어떤 방향성을 가져야 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기도가 더 필요한 부분이다.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에는 대부분 영향을 끼친 신앙적인 인물들이 있다. 평양대부흥 시작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길선주 목사는 감옥에서 요한계시록을 1만독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감옥을 나온 이후에 ‘말세학’을 주장했다. 당시 기독교는 전천년설을 주장했으나 길선주 목사는 전천년설이 아닌 현실을 강조하는 쪽으로 나갔다.

부흥운동은 1910년대 길선주, 1920년대 김익두 이용도, 1930년대 이성봉 등이 큰 영향을 끼쳤으며 1950~1970년대에는 빌리 그래이엄 목사의 영향이 컸다.

김익두 목사는 황해도 출신으로 16세에 과거에 낙방한 후 방탕한 생활을 하고 불량배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 26세에 영생을 체험하고 소알론에게 세례를 받는다. 
평양신학교를 3회로 졸업했다. 김익두의 부흥회는 새벽기도, 오전 사경회, 오후 교리공부, 저녁부흥회 등으로 구성된다.  특히 치유와 간증에 강조점을 두었다. 김익두 집회를 통해 치유받은 사람이 1만명이었으며 50개의 교회를 개척하기도 했다.
또 집회에서 은혜받고 목사되기로 한 사람이 200명이었다. 주기철, 김재준 목사 등이 김익두 목사 집회에 참석해 변화받은 사람들이다.

당시 장로교 조문에는 ‘지금 시대는 이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었는데 김익두 집회에서 치유받은 사람을 중심으로 이적증명을 해서 그 조항을 변경해 볼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장로교 총회에서 부결되는 일도 있었다.

김익두 목사의 영향은 하층민에게 복음이 전파되었고 무신론과 자유주의에서 교회를 지켰다는 점이다. 부정적인 면은 성경보다 감정과 치유 친 점과 당시 현실을 도외시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이용도 목사는 감리교 소속으로 어머니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머니가 감리교 전도부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머니를 핍박했다. 이용도의 일생에 아버지의 어머니 핍박은 많은 영향을 끼친다. 이용도는 한영서원에서 공부했다. 원래 4년 과정인데 10년 가까이 공부한다. 불우한 환경과 감옥투옥 등의 영향때문이었다.

이후 협성신학교에 들어가 정치보다 종교를 통한 민족의식에 눈을 돌리게 된다. 하지만 당시 이용도는 폐병 3기를 맞은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런 어려움에도 부흥회 설교요청을 거절하지 않고 수락하면서 본인이 그 부흥회를 통해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본인의 폐병도 치유함을 받는다.

이 목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집회를 인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용도 목사의 대표적인 영성은 1. 고난 2. 가난 3. 비천함 이다. 신비주의 특성인 하나님과의 합일을 강조하고 무차별 사랑을 강조한다. 하지만 당시그를 반대하는 이들에 의해 불을 끄고 기도를 했다는 점, 여신도들에게 서신을 보냈다는 등의 이유로 이단으로 정죄되기도 했다.

이용도 이후에 교회의 권위에서 벗어나자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중심에 이용도와 다까웠던 김교신이 있었다. 김교신은 일본 우찌무라 간조 밑에서 7년을 배운 사람으로 원래 영문학을 했으나 지리학으로 바꾼 경험을 가진 사람이었다. 김교신의 제자 중 한 사람이 베블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손기정이다. 김교신은 한국에서 성서조선을 시작했다. 함석헌이 김교신의 뒤를 이었다.

-정리: Stone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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