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호 목사 수요성경공부
진보와 보수에 관해
한국과 미국에서 좌파, 우파의 문제가 혼란스럽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입장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세대들뿐만 아니라 우리 자녀들 세대까지 큰 영향을 미치기때문에 상식적으로 좌파와 우파에 대해 알아 봅니다.
일반적으로 ‘보수와 진보’, ‘좌와 우’ 이런 말들을 많이 합니다. 오늘날 보수의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1729~1797)입니다. 보수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에드먼드 버크의 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보수주의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게 가장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좌파라고 하면 칼 막스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에드먼드 버크의 중요한 서적은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1790)이라는 책입니다. 오늘날 보수주의의 기초가 되는 사상을 이루고 있습니다.
버크는 프랑스 혁명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평가절하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일랜드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한 정치인이자 많은 저술을 한 문필가입니다. 그는 블란스 혁명을 실제로 목격한 사람입니다. 버크는 프랑스혁명이 사람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한다고 비판했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정신은 평등입니다. 그래서 루이 16세를 처형하지 않았습니까?
오늘날 동성애 문제도 평등을 다루지 않습니까? 평등과 자유는 서로 충돌하는 사상이 아니라 상호 보완하는 개념입니다. 버크는 ‘사회주의의 실체는 평등을 실천하다가 자유를 억압했는데 그러다보니 가장 불평등한 사회가 됐다’는 아이러니한 말을 했습니다. 그런나 보수주의자들은 ‘자유를 통해서 불평등이 해소된다’고 주장합니다.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와 ‘민주주의’는 비슷해 보이지만 국회의원이나 학자들이 이 용어를 두고 싸우지 않습니까? 이 용어가 21세기 한국에서도 굉장히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나 50~60년 전 이승만 대통령의 저술을 보면 아주 명확하게 정리돼 있습니다. 그래서 임시정부에서 채택한 정부형태를 ‘자유민주주의’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기독교 지도자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보다 그 시대에 ‘자유민주주의’란 개념이 더 명확하게 정의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를 업급할 때 북한도 ‘조선 민주주의 공화국’이라 합니다. 동독도 ‘독일 민주주의 공화국’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임시정부 사람들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이 아주 명확했습니다.
에드먼드 버크가 고민한 것은 영국에서 보니 프랑스혁명을 통해 당시 사회의 기존 질서가 완전히 파괴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태가 프랑스에서 100년간 지속됩니다. 레미제라블을 보면 1830~40년대의 시대를 묘사하고 있는데 프랑스 혁명이 발생한 지 40~50년이 지났음에도 빵 한조각을 훔쳤는데도 감옥에 갈 정도로 혼란한 시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드먼드 버크는 이같은 프랑스혁명을 보면서 하루아침에 사회를 뒤집어 엎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이냐란 질문을 던지면서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기록했던 것입니다. 버크는 프랑스혁명이 진행되면서 몇 만명에서 10만명에 가까운 사람이 죽고 계속 혼란을 겪는 상황을 바라보면서 이 책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버크는 단순한 수구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으로 영국성공회에 소속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만드신 질서를 인간이 마음대로 파괴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에서 버크는 왜 좌파들이 생겨났느냐는 물음에 대해 ‘인간의 이성을 너무 신뢰했기 때문이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이 주신 것을 인간의 것으로 바꾸어버리기 때문에 이같은 불행이 초래됐다는 것입니다. 버크는 프랑스혁명은 비판했지만 영국의 명예혁명이나 마틴루터의 종교개혁은 굉장히 찬성했습니다.
영국의 명예혁명은 영국의 왕정을 종식시키고 의회제도의 기초를 놓았는데 이를 ‘무혈혁명’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버크는 명예혁명을 왕정으로부터 의회민주주의로 출발시킨 아주 훌륭한 혁명으로 칭찬합니다. 1689년 영국의 명예혁명을 통해서 ‘권리장전’(Bill of Rights)이 생기게 되는데 이는 오늘날까지도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버크는 하나님께서 주신 제도가 여러 세대를 지나면서 많은 부분이 훼손되고 왜곡되었지만 이를 완전히 뒤엎어버리면 안된다는 점을 주장합니다. 많은 시간을 거치면서 상당한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만드신 가정, 교회, 사회질서를 완전히 뒤 엎으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칼 막스는 인간의 이성을 통해 파라다이스를 만들려고 했지 않습니까? 버크는 인간은 사회적으로 의존해 있기 때문에 일정한 위계질서는 불가피하다고 말합니다. 어디든지 혁명을 한 이후에 보면 그 시스템은 그 앞에 있는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버크는 우리가 보수의 원칙은 지키되 기본적으로 잘못된 것은 개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진보사상은 그 반대입니다. 역사의 단절을 얘기합니다.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것은 단절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프랑스혁명입니다. 하지만 이후 나폴레옹은 왕정으로 되돌아 가지 않습니까?
좌파에서는 이전 단계를 부정해야 된다.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칼막스의 파라다이스 지상낙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상낙원은 지금까지 있었던 것을 완전히 다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북한의 공산당, 중국의 문화혁명, 러시아 공산혁명을 보면 이전에 있었던 것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러시아는 제정러시아에 있었던 짜르제도를 완전히 없애고 새로운 공산사회 시스템을 만들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제도나 질서는 완전히 부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프랑스혁명을 보면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됩니다. 프랑스혁명은 당시 루이 16세와 왕비 앙트와네트를 참수합니다. 새로운 사회에 대해 군중들이 환호합니다. 하지만 그 이후 100년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사회혼란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 일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로비에스피에로’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프랑스의 집정관이 되었는데 이분은 시골출신의 변호사입니다. 몇 년 뒤에 로비에스피에르는 자신이 루이16세를 죽였던 같은 자리에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여기에서 좌파에 대한 어떤 경계이론이 나옵니다. 로비에스피에르는 모든 프랑스 아이들은 우유를 마실 권리가 있다라고 선포하고 정부에서 우유값을 반값으로 내려라고 지시를 합니다. 이 혁명정책을 발표하자 파리 시민들이 절대적으로 지지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우유를 생산하던 낙농업자들이 우유가 반값이 돼 이윤이 안되므로 소를 잡아 고기를 팔게 됩니다. 그러니 우유가 품귀현상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로비에스피에르는 낙농업자들을 불러 왜 소를 죽이냐고 묻자 소에게 먹이는 건초값이 비싸 소를 죽일 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로비에스피에르는 건초업자들에게 명령을 내려 낙농업자들에게 건초를 반값에 팔아라고 지시합니다. 얼마 지나자 건초업자들은 인건비도 안나오니 밭에 불을 질러 버립니다. 이에 건초값이 폭등합니다. 이제 우유는 혁명군만 마시게 됩니다. 서민자녀는 우유를 구경도 못하게 됩니다. 4년뒤에 로비에스피에르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 * * *
에드워드 피저(Edward Feser)는 ‘왜 대학은 좌파세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가?’(Why are Universities Dominated by the Left?)란 글이 있습니다. 에드워드 피저는 내셔널 리뷰로부터 철학에 있어 현대 최고의 작가 중 한명으로 인정받는 인물입니다. 그는 보수주의 입장에서 현대문화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이비리그를 비롯한 미국의 대학 교수들이 왜 좌파일까? 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교수들이 가진 전제는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불공평하고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든다’라고 생각하고 사회주의는 고귀한 이상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같이 일해서 다같이 나누자’는 멋진 이론이 있다는 것입니다.
북한이나 러시아 공동농장에서 수박을 트럭에 싣고 가다가 떨어지는데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사회주의의 전제는 ‘인간이 완전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한다는 것도 동일하게 분배한다는 것도 인간이 완전하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을 만물보다 더 타락한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회주의의 이론들은 인간의 이성의 위대함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중국의 어떤 선교사말에 의하면 중국 한 성의 주지사만 되어도 사돈의 8촌가지 다 잘산다고 합니다. 주지사의 동생이나 식구가 되면 금덩어리를 실어나르는데 트럭으로 몇대를 실어 나를 정도라고 합니다.
또 자본주의와 우파가 자연을 훼손한다는 주장을 합니다. 미 부통령을 했던 엘고어가 ‘불편한 진실’(Inconievence truth)이란 제목으로 환경을 강조합니다. 영화나 사진, 글로도 환경의 중요성을 언급했는데 대표적인 사진이 작은 얼음 덩어리위에서 북금곰이 앉아 갈데가 없어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입니다. 엘 고어는 환경문제로 노벨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시나리오에 불과한데 지금 과학자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좌파에 속한 사람들은 이론적이고 설득력이 있습니다. 좌파와 우파가 논쟁을 하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인간의 이성을 근거로하고 있는 좌파가 이기게 됩니다. ‘싸우지 말고 열심히 일해서 좋은 나라를 이룹시다’라고 말하지만 그 이론 자체에 오류가 있고 인간의 문제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위선이 나오게 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좌파입니까 우파입니까? 좌파목사, 우파목사가 있을까요?
좌파와 우파란 말은 프랑스혁명 때 의회 왼쪽에 혁명당인 자코뱅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온건파인 지롱드가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좌파와 우파의 개념이 시작됩니다.
좌파의 가장 중요한 강조점 중 하나는 하나님을 배제한 인간의 파라다이스를 건설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처음 시도한 사람이 칼 막스입니다. 이것은 막시즘의 중요한 강조점입니다. 이것이 실패하자 다시 네오 막시즘이 생기게 됩니다.
이들이 기독교 사상을 비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독교는 인간을 부패한 존재로 바라보고 이상세계의 완성을 이 세상이 아닌 내세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좌파와 타협이 될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살아 있는 동안에 인간을 믿을 수 없는 존재로 봅니다.
좌파는 이 땅에 지상낙원을 세우는데 모든 관심이 있지 죽은 이후에 천국에 간다는 것은 이들에게 우스운 일입니다. 그래서 좌파와 기독교는 함께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좌파 목사님, 좌파 크리스천이란 말이 있을 수 없습니다. 기본적인 시스템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에드먼드 버크도 말했지만 이 세상의 질서를 보존하는 것이 ‘보수’라고 했는데 이 가정과 사회의 질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만약 가정과 사회가 잘못되었으면 고쳐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수의 정신입니다. 그러나 좌파는 현재 존재하는 질서를 완전히 없애버리고 새로운 사회 질서를 만들어야 할 것을 주장합니다.
그래서 이 두 사상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좌파 목사님, 좌파 기독교인이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 이러한 이유에서 입니다. 마귀는 언제나 하나님이 세운 질서를 해체 또는 파괴시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이 과실을 먹지말라고 했으나 사탄은 그것을 깨뜨려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사탄의 과실은 하나님의 진리를 뒤집어 엎는 것입니다. 먹지말라고 한 과실을 먹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때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에 주신 3가지가 있습니다. 1. 예배 2. 일하는 것 3.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낙타가 처음에는 코만 천막에 들어갔다가 점점 천막을 차지하고 나중에 천막에 사는 주인을 좇아내고 자기가 그곳에 살게 됩니다.
보수란 개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질서를 잘 보존하고 그 진리가 하나님 말씀에 합당한지 살피고 보존하고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자녀에게 전수하는 그것이 진정한 보수인 것입니다. 보수의 가치가 너무도 중요한데 오늘날 사람들이 이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보수란 우리 자신을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는 것입니다.
기록: Stone Choi.